잃어버린 사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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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오늘은 기분이 어떠신가요?
좋았는데 네가 완전히 잡쳐놨다고 할 수는 없으니만큼 그냥 괜찮아, 짧게 손만 내저었다. 그러신가요, 하지만 표정이 좋지 않으신 걸요. 제가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졸졸 따라붙는 목소리를 괜찮아, 앉아있어. 아침 뭐 먹을래? 앉혀놓고는 앞치마를 두르자 마스터, 그건 제가 할까요? 순응하는 대신 기묘한 복종심을 보인다. 아니, 괜찮다니까! 내가 앉아있으라 한 거 못 들었어? 꼭 역정 한 번 듣고서야 죄송합니다, 무례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잔뜩 시무룩해져 소파를 찾으니 통곡을 해도 수백 번은 할 노릇이다. 인간화된 하로도 아니고 저게 뭐란 말인가, 갑자기 두통이 나 짧게 이마를 짚었다. 조금이라도 오래 올렸다가는 마스터, 어디 편찮으신가요? 또 걱정을 날리리라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이런 동작은 최대한 조용히 해야만 했다. 무어라 말을 건네는 대신 식탁 건너를 조용히 넘겨보았다. 거의 반쯤 누운 자세로 숨만 몰아쉬는 샤아를 본 순간 불안과 찌릿한 연정이 섞여 가슴이 묵직이 내리 앉았다. 샤아, 서둘러 달려가 말랐을 뿐더러 살 붙을 기미조차도 보이지 않는 몸을 끌어안은 귓가로 주인님, 왜 그러세요? 파고들은 말씨는 무척이나 상냥하다. 마스터... 평생 들어온 목소리건만 저 호칭만은 아직까지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기실 행동도 그랬다. 제가 19년간 안 샤아는 누구보다 명석한데다 날카로워 타인을 절대 들이지 않는 사내였을진대 어쩌다 이런 모습이 되었는가. 아무로는 제 목덜미를 감싸오는 팔을 느끼며 가만 꺼풀을 감는다.
제 2차 네오지온 항쟁이 끝난 후 포로로 잡힌 샤아는 은둔 귀재답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연방은 당장 닥친 일밖에는 생각할 줄 몰라 저 녀석이 다시 나타날 경우 어째야 하느냐 발을 동동 굴렀으나 아무로 제 생각은 전혀 달랐다. 겉은 멀쩡해도 지구낙하 당시 온 내장이 다 찢어져 망가진 애가 도대체 어딜 갔느냐, 오래 살기는 하겠느냐는 생각뿐이 들지 않아서 미친 듯이 온 콜로니를 뒤졌다. 두 계급 특진해 소령이 되고도 우주 탐사와 경비 역을 자원한 데는 그 이유도 있었다. 남 잘 되는 꼴을 도통 보지 못하는 고위 관료들이 저렇게 꼭 착한 척하는 애들이 대중 인기를 얻어 한 자리 잡아보려 한다고 던진 빈정거림은 무시했다. 애시당초 처음 건담을 탔을 적부터 듣지도 않았다, 만약 제가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들까지 다 신경 쓰는 성격이었더라면 군인생활 오래 해먹지도 못했을 터였다. 과거 네오지온 확립기 시절 7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지하 온 곳을 전전하며 기회를 엿본 샤아를 모르지 않았기에 마침내 영원한 평화를 맞이한 마냥 온 세상이 조용해져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했다. 이런 적막을 찢어 나타나는 놈이 샤아임을 누구보담 잘 알았다. 그리고 양반은 못 되는 샤아는 예상대로 2년 정도여가 지나고서야 그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온전한 형태는 아니었다.
붉은 MS입니다! 샤, 샤아인가?! 아무로 소령님, 소령님이 와보셔야 할 것...! 그 말만을 남긴 채 산화해버린 제 부하를 대신해 출동한 눈 가득 비친 기체는 과연 시뻘갰다. 거대한 몸체와 짧은 팔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저게 그 네오지온이 개발했다는 신형인가... 언뜻 정보를 받아본 적은 있었다. 정확한 기체명은 모르겠습니다만 저쪽은 이걸 나이팅게일이라 부르더군요, 설마 백의의 천사는 아니겠지요. 너무 빨갛잖습니까, 샤아 용인 건지. 어쨌든 그 녀석 살아있기는 할 테잖니까요, 제 기체를 봐주는 엔지니어가 한 말이 귀를 쟁쟁 울렸다. 정말 샤아인가, 가슴이 바짝 달아 무작정 샤아! 외쳤다. 아무로 레이? 그 목소리에는 예전과 같은 절절한 감정이 없어 무언가 잘못됐다 생각했다. 뭐지? 이 위화감은 뭐지? 분명 샤아인데, 이런 목소리와 울림을 가진 사람은 걔 밖에는 없을 텐데...! 몇 번 주먹만 쥐었다 폈다 하다 샤아 맞지? 너지? 재차 물었다. 다 불탄 MS를 보던 모노아이를 스산히 돌려 공격 자세를 잡는다. 샤아 아즈나블, 너냐고! 대답하랬잖아! 순간 아무로 레이, 그 이름이 코드명처럼 우주를 울렸다. 너는 내 적이다. 판넬이 일점사격 형으로 모였다.
마스터의 명을 따라 너를 제거하겠다.
마스터...? 명령...? 네가 왜...? 그 생각을 미처 끝마치기도 전 공격이 쏟아들어 와 우선 몸을 피했다. 젠장, 샤아! 좀! 사람 말 좀 듣고...! 2년 전보다 훨씬 날카롭기는 했으나 어딘가 패턴이 단순한 구석이 있어 막지 못할 류는 아니었다. 오히려 어느 면에서는 예전 공격이 훨씬 변칙적이었다, 판넬을 하나하나 쏴 부서뜨리고서야 비처럼 쏟아 내리는 위협을 피할 수 있었다. 샤아, 샤아. 어째서 지금 나타난 거야? 마스터가 뭐야, 넌 누구 명령도 안 듣는 애였잖아! 게다가 그 호칭, 너무 강화인간 같다고...! 찰나 무슨 소리인가, 아무로 레이? 의문 가득한 소리가 터졌다.
나는 강화인간이다. 네가 나를 어떻게 알지? 너는 내 적인데.
무언가 잘못됐다, 고 생각했다. 강화인간? 강화됐다고? 그럼 내가 아는 샤아는...? 틈을 보이기가 무섭게 파고들은 붉은 기체를 간신히 막아냈다. 샤아, 정신 차려! 넌 강화인간 따위가 아니야, 알잖아! 강력한 사유를 보내도 돌아오는 말은 몰라, 뿐이었다. 몰라, 아무로 레이! 몰라! 나는 강화인간이다, 너는 내 적이다! 나는 마스터가 내린 명을 받들어 너를 죽일 뿐이다! 나를 현혹시키려 하지 마라...! 번쩍번쩍 벌겋게 빛나는 빔 샤벨이 제 눈을 찌르는 듯해 급히 기체를 뺀 다음 판넬을 전개했다. 샤아, 너를...! 허나 다음 동작은 이뤄지지 못했다. 익숙하니 전투 모드를 종료하고는 오늘은 이만 끝내지, 아무로 레이. 마스터께서 부르신다, 널 상대해줄 시간 따위 이제 없어. 다음에는 꼭 죽이겠다, 뒤돌아 유유히도 가버리는 샤아를 그저 멍하게 보고만 있었다. 뒤늦게 응전 소식을 접하여 찾아온 브라이트가 아무로, 아무로! 뭐하나, 방금 전 그 MS는 뭐였어! 네오지온이 개발한 신형인가?! 외칠 때까지 멍청히 서있기만 했다.
물론 함을 밟고서도 멍청히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민히 움직였다. 브라이트, 아무래도 샤아가 강화인간이 된 것 같아. 온갖 상황을 접해듣는 함장인 만큼 기절하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놀랍기는 한지 그 샤아가? 내가 아는 샤아 아즈나블 얘기 맞지? 여러 번 되물은 브라이트에게 그래 맞아, 우리가 아는 그 샤아 아즈나블 얘기야. 네오지온 총수였던 애 말이지, 가만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펜을 부러져라 쥐었다. 누가 감히 그 애를 그렇게 만들었지? 누가? 함장석에서 내려와 우주 지도를 펼쳐 앉은 단정한 미간에는 1년 전쟁 시절에나 본 고뇌가 가득했다. 샤아가 강화인간이 됐다고, 이거 큰일인걸. 뉴타입 능력도 분명 강화됐을 거야, 일반 파일럿들이 상대했다간 일방적인 학살이 될 테니만큼 그들은 물리는 편이 좋겠어. 아무로, 네가 전담으로 맡아야 할 것 같은데. 이건 벌써 연방 귀에도 들어갔을 거야, 틀림없이 그 겁쟁이들은 네게 일을 떠넘기겠지. 네가 제대로 못 처리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니냐고. 너도 예상은 되지, 아무로? 게다가 방금 전 또 놓쳤으니까. 달리 할 말도 없어 인상을 찌푸렸다. 연방이 벌이는 호들갑쇼나 책임전가를 보기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긴 해도 역시 마치 온전히 개인 잘못인 마냥 호도하는 모습은 짜증났다. 그나저나 그 샤아가 강화인간이라니, 믿을 수 없어. 그렇게 자의식 강한 애가... 대답하는 대신 입술을 콱 깨물었다. 내장이 다 짓이겨져 오늘내일하던 중이었으니만큼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는 없다 결단했는지도 몰랐다. 정신개조 쪽은 물론이고 세포배양 분야도 연방을 한참 앞서는 네오지온으로서는 유일한 지도자를 잃기보다는 차라리 윤리를 어기는 편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었을 터라 납득은 갔다. 허나 그와 이해는 다르다, 겨우 이기심 때문에 샤아는 저 꼴이 됐단 말인가, 죽지도 못한 채 정신마저 잃고. 부들부들 떠는 어깨를 진정해, 아무로. 진정하라고, 몇 번 두드린 브라이트가 우주 지도를 두드렸다. 네오지온 본거지는 이쪽이야, 아마 샤아 상태가 안정되자마자 새 국가를 천명할 예정이겠지. 강화인간 자아를 확립시키기 위해서는 최소 3년이 필요해. 앞으로 1년간은 계속 지금처럼 게릴라전을 벌이겠지. 예전 붉은 혜성 명성도 다시 좀 되찾아주고... 너무 냉정하게 들리나? 하지만 이게 현실이야, 아무로. 너도 알잖나. 어쨌든 네오지온 놈들 속은 빤해. 새로운 국가를 선포하기까지 남은 기간동안 샤아를 계속 실전 투입해 뉴타입 감각을 길러줄 셈인 거다. 아무로 너는 그저 연습상대일 뿐이지. 우리는 그걸 역이용해야 해, 그 방법밖에는 없어. 연방이 본격 개입하기 전 샤아를 생포한다. 그게 우리 계획이야. 지금 당장은 연방이 샤아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싫어 그 무거운 엉덩이만 뭉갤 테니 기회는 이때야. 샤아를 어떻게든 생포하자, 내가 돕겠다. 당장은 나도 크게 맡은 임무가 없으니까. 상부에는 샤아가 살아있는 것 같으니까 조금 조사해보겠다는 언질만 남긴 다음 우리끼리 해결 보자고. 아무로 너는 이 근처 보급부대를 찾아라. 나는 상부 쪽 구 에우고 인사들과 접선을 해볼게. 연방 정부가 본격적으로 손을 댈 경우 샤아를 빼낼 수 없으니까. 사실 나는 크게 상관없지만 너는 신경 쓰이잖아, 그렇지? 정곡을 찔려 그럼 출격할게, 고마워 브라이트. 늘 신세만 지네, 부러 태연한 척 일어서자 난 널 이해해, 아버지처럼 엄격하면서도 다정한 어조가 등을 두드렸다. 난 널 이해한다, 아무로. 네가 샤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대충은 알 것 같아. 너무 오만한가? 입을 여는 순간 울음이 섞일 것 같아 몸 돌린 그대로 손만 까닥이고는 함장실 문을 나섰다. 상부와 연락은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넌 샤아 잡기에만 집중해라. 알았지? 그 배려가 너무나도 황송해 알았어, 브라이트. 정말 고맙다니까, 간신히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방금 전 들은 감정 하나 없는 목소리가 귓가를 아룽아룽 적셨다. 아무로 레이, 제 이름을 그렇게 무기질적으로 부를 줄은 상상조차 못했기에 타격은 더했다. 언제나 감정을 가득 담아서 불러줬었는데, 이렇게는 아니었는데... 급작스레 터진 울음은 멈출 새를 몰랐다. 아, 아무로 소령님! 오랜만입니다, 2년만이지요? 인사를 하려 다가온 사람들도 상황을 파악하고는 바삐 자리를 피했다. 함장님이 소령님을 혼내기라도 하셨나봐, 하긴 1년 전쟁 동료셨다니까. 하여튼 우리 함장님도 참 엄격하시지, 중간을 모르셔. 그래도 최근에는 꽤 유해지셨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봐, 걱정 섞인 수군거림들을 피해 얼른 콕핏 깊이 몸을 숨겼다. 샤아, 눈물로 얼룩져 척척해진 볼을 뭉개듯 닦아낸 다음 서둘러 조종간을 잡았다. 하루가 급했다.
과연 전투를 수백 번 역전시킨 경험이 있는 베테랑 함장 브라이트 노아는 선견지명도 지닌 사람이었다. 근 2년을 보상해주겠노라는 양 미친 듯이 샤아를 출격시키는 네오지온을 막을 자는 천재이자 기막힌 감을 가진 아무로 레이뿐이 없었다. 역시나 당장은 샤아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공표할 수 없으니만큼 당분간 그쪽에서 알아서 해주길 바란다는 전언을 보낸 연방에게는 무엇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사실 이번에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편이 좋기도 했으므로 그저 알겠다, 하지만 연방정부가 개입하기 전 우리가 먼저 샤아를 잡을 경우 처리권을 완전히 넘겨달라는 답장만 보냈다. 기실 연방으로서도 잡아와봐야 처치곤란인 인간이 샤아거니와 무엇보담 아무로가 맡을 시 저번처럼 탈주한다 해도 남 탓할 수 있기에 선선히 승낙해준 것도 당연했다. 다만 못 잡았을 때는 브라이트 노아와 아무로 레이가 모든 책임을 져야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어쩜 눈엣가시인 둘을 같이 보내버리겠다는 심산인 듯도 하여 그저 허허 웃었다. 정말 대단하지, 연방도. 하나도 안 변했어. 앞으로도 안 변할 걸? 이러니까 샤아가 열 받았지. 그 어느 날 제가 한 말을 그대로 읊는 브라이트를 보며 그거 내가 한 말 아닌가, 미소 띤 그대로 어깨를 으쓱했다. 이 말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연방군 중 있으려고? 함장석을 박차 일어나 다시 우주 지도를 펼친 브라이트는 조금 전보다 훨씬 진중한 낯이었다. 샤아 기량이 점점 더 올라와. 붉은 혜성이라는 말이 무색치가 않아. 전투 패턴도 처음에는 제법 정석적이었는데 지금은 정말 변화무쌍하다. 최대한 빨리 승부를 내야겠어. 아무로 너도 동의하지? 강제로라지만 완전한 뉴타입이 됐으니만큼 이제는 너와 싸워도 아주 밀리지는 않을 거야. 실제로 예전에도 확 밀리지는 않았잖아. 그 날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어쨌든 지금 이는 중요하지 않지. 벌써 보급부대들이나 최전선기지들이 많이 파괴됐어. 아주 가루가 됐지. 연방 정부는 요지가 아니니만큼 그냥 두고 보자는 입장인 듯하지만 나 같은 사람들한테는 중요도가 다르거든. 갑자기 연료가 떨어지거나 함이 고장 났을 때 갈 곳이 없어져서는 곤란해. 고위 관료 놈들은 실무를 몰라. 그 말을 듣다 알았어, 다리를 바꿔 꼬았다. 본거지로 쳐들어가는 쪽이 좋을까? 아님 샤아를 따로 유인하는 게 나을까. 어느 쪽이 낫겠어, 브라이트? 저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전폭적인 지원이 없으니까 최대한 머리를 굴려야 해. 필요할 경우 육탄전도 불사하겠어. 샤아와는 몸 부딪혀본 적이 있다. 조용히 말한 아무로 쪽으로 돌은 검은 눈이 솔직히 말하자면, 팔짱을 꼈다. 지금은 육탄전을 피하는 게 좋아. 샤아가 강화인간이 됐잖아. 강화인간들은 힘도 세다고, 귀여운 외모... 아니 샤아는 잘생긴 거지만 여하튼. 귀여운 외모와 달리 힘이 아주 장사들이야. 샤아도 그렇게 강화됐을 확률이 높아서 그건 별로 추천하지 않아. 네가 맞아 죽어서는 정말 곤란해, 아무로. 그런 개죽음을 당했다간 우주가 격변을 일으켜. 샤아를 막을 자가 없어지는 거잖아, 카미유 비단과 쥬도 아시타는 이미 은퇴한지 오래라고. 그 애들을 다시 데려오기는 싫어. 잘 벗어난 애들을 다시 전쟁터로 끌어들이는 일만은 피하고 싶어. 너도 내 말 알지? 그 애들은 너와 달라, 전쟁을 좋아하지 않아. 아마 불러도 오지 않을 거야. 아, 카미유는 오려나? 크와트로와 친했으니까. 갑자기 울컥 짜증이 솟아 나도 전쟁을 좋아하지는 않아!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난 그저 샤아가 있어서... 벌컥 일어났다 다시 주저앉았다. 샤아가 있어서. 제 목소리가 뇌를 들쑤셨다, 아무 말 않은 채 꺼먼 지도만 펄럭이는 남자다운 손을 멀거니 응시했다. 샤아가 있어서 그랬어. 브라이트는 언제나처럼 냉정한 낯이다. 이번에도 샤아가 있지, 아무로 네가 나서야겠군. 우리 선에서 끝내자고, 이번에도 죽을 각오로 보조해줄 테니까. 팔락이는 지도 끝을 잡아 천천히 끌어내리고는 시선을 맞췄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서로가 어떤 생각인지는 또렷이 보였다. 함께 사선을 넘나든 동료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선이었다, 뉴타입끼리 하는 공명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지만 훨씬 안정적이었다. 알았어, 브라이트. 이번에도 믿어. 맡겨만 달라는 듯 상대가 손을 들어보였다.
각개전투인지라 시간은 무한정 늘어졌다. 특히 샤아가 적을 죽여 버리겠다 이를 갈면서도 마스터 명령 없이는 제대로 나서지 않아 더욱 그랬다. 아직 아무로 레이와는 1:1 전면전을 할 실력이 못 된다 판단했는지 네오지온 상층부는 좀처럼 다운 전투를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불이 붙으려고만 하면 돌아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적기가 오기를 기다리다 결국 먼저 나서야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브라이트, 다음에는 만나자마자 내가 공격을 퍼부을 거야, 알았어? 맞춰서 지원해줘. 헬멧을 내던지다시피 벗은 다음 노멀 수츠마저도 거칠게 풀어내려 숨구멍을 틔운 아무로 쪽으로 다가온 브라이트가 그게 최선일 것 같아? 네가 내린 판단이니만큼 정확하겠지만,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아무래도 안 되겠어. 샤아 기량이 더 발전하기 전 일을 마무리지어야 하는데 완전 시간끌기라고. 벌써 3개월이 지났어, 9개월 남았다. 연방이 전쟁 진행이 지지부진하다 판단해 언제 개입할지도 모르건만 이대로 여유롭게 봐줄 수는 없어. 브라이트, 너도 언제까지 여기 매달리기는 힘들잖아? 다들 막다른 골목이라고, 게다가 샤아 상태도 봐야해. 강화인간이 됐잖아... 얼마나 더 강화됐을지 모른다고, 점점 감정이 사라져가고 있어.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느껴, 그 녀석이 얼마나 강화됐는지. 이제 내가 아는 샤아는 거의 없다 봐도 좋아... 처음에는 그래도 조금은 느껴졌는데... 또 울음이 터질 것 같아 눈두덩만 꾹꾹 누르니 툭툭, 다정스런 손길이 와 닿았다. 아무로, 진정해. 그건 데려와서 걱정해도 될 일이야. 샤아를 되찾는 데만 집중하자고, 당장은... 브라이트 역시 혼란스러워 하는 기색이 만연했으나 저까지 흔들려서는 안 된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알아, 안다고. 누구보다 잘 알아. 다 끝나고 해결 봐도 되지. 그런데. 훅 북받쳐 목 끓이는 설움을 간신히 삼켜 내렸다. 내가 아는 샤아가 없어진다는 거, 그게 얼마나 괴로운 지 알아? 하루건너 몇 번씩 마주치는데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거야. 그게 얼마나, 얼마나 버티기 힘든 일인지 알기나 해? 내가 16년간 알아온 샤아가 사라지는 중이야, 나는 그래서. 두 손을 펼쳐 얼굴을 묻었다.
너무 괴로워.
이제 그 녀석은 정말 처음 보는 강화인간이나 마찬가지야.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해, 이제는 혼란스러워하지도 않아. 그래도 첫날은 어떻게 네가 나를 아느냐 묻기라도 했거든. 지금은 뭐라는지 알아? 아무로 레이, 너는 내 적이다. 너를 물리쳐야 온 세상이 평화로워진다, 그 얘기만 해. 내가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아. 자길 현혹시키는 거라고도 여기지 않아, 모르는 사람이니까! 기억나지 않으니까. 브라이트, 나는... 마침내 쏟아진 울음이 하얀 바지를 점점이 물들이는 모양새를 어쩔 수 없어 브라이트는 그저 가만 서있었다. 나는, 언제나 내가 샤아를 죽이게 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만 걱정했거든. 그런데 이제는 다른 걸 걱정해. 무릎을 감싼 손등 가득 선 핏줄은 무척 남자다웠으나 그 손목 위로 이어진 어깨는 갓 전장을 밟은 소년이라 해도 괜찮을 만치 여려보였다.
샤아가 날 잊으면 어쩌지?
샤아가 날 잊을 수도 있어, 이미 잊었을 지도 몰라. 어떡해? 나는 나를 모르는 샤아 따위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어, 내가 그 애를 쫓았듯 샤아도 언제나 나만을 쫓았단 말야. 그런데, 그런데 이제 샤아는 제 마스터가 명령을 거둘 경우 나를 보지도 않을 거야. 내가 덤벼들어도 너는 내 적이 아니니까 물러서라며 귀찮다는 듯 손짓이나 하겠지. 내가 그걸 봐야해? 브라이트, 나 샤아 찾아야 해. 마지막은 거진 애원이었다. 거의 무릎 꿇어 브라이트를 붙잡아 외쳤다. 브라이트, 나 샤아 되찾아야 해. 누군가 그 애한테서 나를 도려내는 꼴, 나는 못 봐. 절대 못 봐, 그러니까 도와줘. 도와줘, 브라이트. 부탁이야, 연방정부에게도 뺏길 수 없어. 손등을 척척히 적시는 눈물을 대충 바지 여기저기 문질러 닦아내고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당혹스런 낯을 한 어깨를 꽉 눌러 잡았다.
샤아는 내 거야.
나처럼 그 애도 나만 봐야 해. 알았어? 그러니까 다음 대적 때는 그 애가 도망쳐도 내가 끝까지 쫓아갈 거야. 설사 육탄전을 하게 된다 해도 마찬가지야. 오히려 그럼 고맙지, 기절시켜서라도 데려올 테니까. 날 제대로 지원해줘, 이번에야말로 네오지온을 완전히 부숴버리겠다. 샤아만 데려와도 다음은 정부가 알아서 해주겠지, 그 정도 힘은 있는 놈들이니까. 에너하임 사나 거래처가 사라져서 조금 안타까워하겠군,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잘 자, 브라이트. 대답을 듣는 대신 문을 박차 나갔다. 브라이트 역시 만류하지 않았으므로 그대로 그 날 회의는 막을 내렸다.
다음 날 출격을 준비하다 아무로 님, 오늘 결판을 내실 예정이시라면서요? 만약 샤아와 만날 경우 말이죠, 정말 기대됩니다. 1년 전쟁 영웅이신 아무로 님을 도울 수 있다니요, 넉살 좋은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위치를 확인했다. 과거 화이트베이스 동료 류 호세이와 하야토 코바야시를 연상시키는 퉁퉁한 몸을 보자 괜히 마음이 너그러워져 그래, 담담히 장갑 단추를 채웠다. 샤아가 다시 돌아올 줄은 몰랐어요, 정말 대단하네요. 적이지만 솔직히 대단해요, 그렇지 않나요? 그와 싸우는 아무로 소령님은 더 대단하시지만요, 웃음 섞인 말에는 그래, 형식적인 말뿐이 건넬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샤아를 되찾아 다시 저를 박아 넣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움직이는 머리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해야 한다는 기본적 교류 프로세스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상대가 너무 긴장해 대답을 삼간다 생각했는지 그럼 오늘도 힘내십시오, 소령님. 저희가 확실히 보조하겠습니다, 여전히 웃는 낯을 한 채 저 멀리 걸어가는 남자를 응시하다 푸, 짧게 어깨며 손목을 털었다. 확실히 긴장되긴 한다, 2년 전 제 2차 네오지온 항쟁 시절 이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육탄전을 31살이 된 지금 와 잘 할 수 있을까도 의문이었다. 달리 선택지가 없으니까, 허벅지 춤 즈음 달린 권총과 레이저 건까지 확인하고는 무언가 열심히 지시하는 브라이트 쪽으로 향했다. 브라이트, 제법 엄중한 낯을 한 그대로 허리만 돌려 왜 그러지, 아무로? 뭐 당부할 사항이라도 있나? 물은 그에게 어제는 정말 미안했어, 까닥 머리를 숙였다. 흥분했었나봐. 그렇게 몰아붙일 의도는 아니었는데 정신차려보니 그렇게 됐네. 고의는 아니었다지만 미안해. 이렇게 복잡한 일은 처음이라는 양 허리를 짚은 채 푸우, 마냥 한숨만 쉬던 브라이트가 이해해 아무로, 함장석을 등졌다. 근 20년 전보다 나이든 얼굴을 마주하니 갑자기 짠해졌다. 그에게도 내가 이렇게 보일까, 15살 어린 꼬맹이가 참 잘 컸다 생각할까. 알 수는 없다, 제아무리 뉴타입이라도 일반인들 머릿속을 꿰뚫어볼 능력까지는 없어 그냥 발끝만 뭉갰다. 네가 샤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 넌 그 애를 무척 좋아하지. 그리프스 항쟁 때도 그렇게 생각했어, 넌 정말 샤아를 좋아하는구나. 하지만 지금은 냉정해야 해, 냉철하지 못해서는 아무것도 안 돼. 왠지 알아? 그 샤아가 지금은 너보다 더 냉정하거든, 널 잊었는데 라라아라고 기억할 것 같아? 아니, 걘 지금 라라아도 모를 걸. 아마 마스터와 제가 적이라는 밖에는 알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네가 냉철해야 한다고, 아무로. 나는 지원역이지 너와 함께 최전선을 달려주지는 못해. 어디까지나 난 네 보조고 네가 무너질 경우 나 또한 목숨을 보장할 수 없어. 분명 눈엣가시였을 나부터 죽이겠지, 당연해. 난 그걸 무릅쓰고 널 돕는 중인 거다, 출세에도 전혀 도움 되지 않을 짓을 하는 거야. 그게 내 정의니까. 아무로, 네 정의를 관철하길 원하나? 그럼 머리 좀 식혀. 이 꼴로는 개죽음이나 당할 거다. 샤아는 전성기적 기량을 거의 회복한 데다 뉴타입 능력도 강제 개화해 어쩜 2차 네오지온 항쟁 시절보다도 더 강해졌을지 모른다. 너는 그런 놈과 싸워야 하는 거야. 모쪼록 조심해라, 아무로. 최선을 다해 지원해줄 테지만 결국 칼자루를 쥔 사람은 너야. 너 말고는 아무도 결판을 낼 수 없어. 샤아는 이런 전함에 무릎 꿇을 녀석이 아니다. 잊지 않았지? 1년 전쟁 시절 녀석이 왜 공포의 대명사였는지. 혼자 다섯 척을 없앤 녀석이야, 그 실력은 여전할 거다. 아니, 그대로지. 잘 싸워, 네가 무너질 시 우리도 끝장이다. 물론 연방도 끝장이지, 아무도 샤아를 막지 못할 테니까. 전선을 떠나 일반인이 된 카미유와 쥬도는 실전감각이 떨어져서 바로 샤아에게 대항하지 못할 거야. 그 사이 몇 명이 더 죽을지는 알 수 없어. 정말 모를 일이야, 그러니만큼 우리 선에서 끝내자. 우리가 그나마 실전감각이 쌩쌩하잖아? 힘내자고, 아무로. 우리는 같은 배를 탔어. 어쨌든 난 네 제안을 받아들인 직후부터 계속 네 편이었으니까. 연방 정부를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고 말이야, 툭툭 격려하듯 어깨를 치고는 다시 함장 석으로 올라가 우현을 체크해! 무기는 발포 가능한 상태인가? 한 치 실수도 범해서는 안 돼! 다 생사와 직결된 것이다! 이런 데서 죽어서는 안 되지 않겠나! 위엄 있게 소리치는 옆모습이 믿음직스러워 살짝 웃었다. 그렇다, 어쨌든 샤아를 막을 이는 자신뿐이다, 그가 어떤 모습이 됐더라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이 역시 저밖에는 없었다. 힘내자, 아무로는 제 헬멧을 끌어다 가볍게 입 맞춘 다음 자리를 박찼다. 아무로 소령님, 힘내십시오! 오늘도 무사귀환하시길 바랍니다! 우렁찬 소리들이 뒤를 따랐다.
전투가 고조되자 어김없이 등을 돌려 도망치는 샤아를 미친 듯 뒤쫓았다. 당사자나 명령을 내리는 네오지온 상층부 관계자들 역시 이 상황은 예측하지 못했는지 붉은 기체는 시종일관 우왕좌왕했다. 2차 네오지온 항쟁 시절 사아였더라면 분명 소행성이며 운석덩이를 깨부숴 잔재를 남겨 유려히 도망갔을 터이나 지금은 아직 강화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길 찾기에만 급급했다. 아무로 레이, 왜 나를 쫓아오지? 내가 너의 무엇인데? 답잖게 교란까지 시도하는 꽁무니 끝을 바짝 따르며 아주 박살을 내 주마, 무기를 꼬나 잡았다. 아무로 레이, 나는 오늘은 너와 싸우지 못한다! 명령이 하달되지 않았어! 전면전을 벌여 몸을 상하게 하기 보다는 저희 영역으로 돌아와 지원사격을 받는 쪽이 훨씬 유리하다 생각한 모양인지 네오지온 상층부는 끝끝내 공격 명령을 보내지 않았다. 하기사 아직 전투 방식마저도 완전히 익히지 못해 여기저기 실수연발인 애를 인생 절반 이상을 전쟁터에서 보내 베테랑 중 베테랑이라는 소리를 듣는 아무로와 대적시켜봐야 결과는 뻔했다. 그래서, 봐주라고? 쫓아오지 말라고? 이건 전투야, 샤아 아즈나블! 이런 돌발 상황 시뮬레이션도 안 돌려봤어? 어쩐다, 나는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서. 이 아무로 레이를 뭘로 본 건가?! 오늘 널 아주 아작 내주겠다. 널 가만 두지 않겠어! 응전을 하든 약점을 보이게 하든 하기 위해 부러 강한 말투를 쓰자 아무로 레이, 네가 감히...! 목 가장 깊은 곳 즈음부터 그르렁대는 울음을 냈다. 마스터! 싸우겠습니다, 싸우게 해주십시오! 그 말이 가슴을 뚫었다. 마스터, 마스터. 조종간을 꽉 움켜쥔 채 그 꽁무니를 노려보다 죽여 버리겠어! 정말로, 정말로 죽여 버릴 거야! 빔 샤벨을 들어 다리 한 짝을 잘라놓았다. 윽?! 예기치 못한 일격을 받아 당황했는지 얼른 방향을 틀어 저를 마주본 기체의 다른 쪽 다리 부분에 다시 무기를 꽂아 넣었다. 터뜨려서는 안 된다, 터지는 순간 샤아도 죽고 만다. 신중히 되뇌며 느릿히 몸을 떨어뜨린 찰나 감히 네가 나를, 짐승울음 같은 악 받힌 비명이 올랐다. 오늘에야말로 너와 결판을 내겠다, 아무로 레이! 너를 내가...! 아, 아...! 칼날처럼 쏘아 보낸 무시무시한 경고가 무색하게도 그 맹렬한 움직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멈췄다. 왜, 왜 싸우지 못하게 하십니까! 왜요! 아, 아 머리가 아파! 그만, 그만! 싸울래, 싸우겠습니다! 아, 아아, 머리가...! 아무로는 직감했다. 이건 강화다, 마스터가 내린 명령을 거부하려는 강화인간을 벌하기 위함이다. 샤아를 위해서는 더 공격해야한다, 그리 판단하기가 무섭게 다시 빔 샤벨을 꼬나 잡았다. 판넬을 써 여러 군데서 공격하는 편이 훨씬 편하기는 하겠지만 그랬다간 엔진이나 중요 파트가 손상돼 폭발할 지도 모르거니와 무엇보담 네오지온 상층부 관료들에게 이길 수 있는 상대라는 인식을 주는 쪽이 중요해 부러 아슬한 방법을 택했다. 게다가 기체가 완파될 지경이 될 경우 저쪽에서도 결국 임전하라 하겠지, 이게 샤아를 위한 길이야. 여즉 괴로워하는 몸뚱이를 붙잡아 가슴 부분끼리 부딪치자 아악! 고통 담긴 비명이 올랐다. 미안, 미안 샤아. 하지만 어쩔 수 없네, 입술을 잠시 깨물었다 놓고는 여기서 완전히 부숴주마, 목을 긁었다. 네 말마따나 너와 나는 너무 악연이야! 너는 내 적이지, 아무래도 여기서 숨통을 끊어놓는 게 앞으로도 편하겠군 샤아! 수많은 전장을 헤쳐 온 베테랑 함장인데다 원래도 파일럿 역량을 믿는 브라이트는 파일럿들이 임무 수행만 잘 해준다면야 무슨 소리를 하든 모두 작전이겠거니 신경 쓰지 않았으므로 굳이 말 수위를 조정할 필요는 없었다. 마스터, 마스터 제발, 제발 전투 명령... 명령을... 제발 부탁입니다...! 이 와중에도 저를 쳐다보기보다는 마스터 구원만을 애타게 바라는 그 모습이 짜증나 이쪽이다, 샤아! 네 적은 나야! 기체 옆구리 쪽을 거칠게 걷어찼다. 크윽...! 개자식이! 아, 아아! 마스터, 제발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직감이 듦과 동시에 나머지 다리 한 쪽까지 잘라냈다. 1년 전쟁 시절 막바지 때 본 기체와 모양새가 비슷해져 조금 눈물이 났지만 내색했다간 일을 그르칠 확률이 높아서 마음만 다졌다. 마침내 붉은 기체가 태세를 다졌다, 아무로는 온몸을 긴장시켰다.
이번에야말로 죽여주겠다, 아무로 레이!
그거, 예전에도 한 말인 거 알아 샤아? 부질없는 물음은 던지지 않았다. 그리도 소중히 여긴 라라아조차도 잊어버렸는데 그런 단편적인 조각들을 기억하리라고는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이대로 유인하다 기체를 폭발 직전까지 이끌어야 해, 샤아와 육탄전으로 승부를 본다. 물론 쟤는 당연히 안 내리려 할 테지만 인망 있는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 네오지온 상층부 놈들이 가만 지켜볼 리가 없지. 아마 분명 탈출하라는 명령을 내릴 거야, 대충 예측을 갈무리한 다음 브라이트를 호출했다. 왜 그러나, 아무로? 네 예상대로 되어가는 중인 거지? 혹시 빗나간 곳이 있나? 그 믿음직스러운 목소리를 듣자 마음 한 구석이 시원해졌다. 아니, 없어. 앞으로 내가 할 일을 말해주려고. 우선 샤아를 내리게 할 거야, 내가 육탄전을 시작하면 지원군을 보내줘. 파일럿인 게 좋겠어, 샤아를 데려갈 거다. 아마 저쪽에서도 잔챙이 파일럿이나마 보낼 테니만큼 MS인 쪽이 훨씬 좋겠지. 내가 다시 콕핏을 닫을 때까지만 부탁해. 그리고 아마 샤아는 이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거야. 정말 아무것도... 그러니까... 이건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연방 몰래 강화인간 조정 기계를 빌리고 싶어. 티탄즈 연구소 쪽에서 쓰다 버려둔 게 어딘가 남아있다 들었어. 카이나 벨토치카 혹은 과거 에우고 녀석들에게 연락해줘. 물론 카이야 대번 질색팔색을 하겠지만... 어쨌든 부탁해, 시간이 없어. 무전 끊는다.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지 아는 브라이트로서는 아무로, 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뭘 하려고! 소리쳐 부르기도 애매했을 터다. 지금은 죽고 없는 퀘스 파라야라는 소녀가 어느 날 날카롭게도 외친 아무로, 당신은 좀 교활해요! 말이 마음을 묵묵히 눌렀다. 그래, 나는 정말 그런지도 모르겠네. 사실 많이 그럴지도, 허나 그런 감상을 느낄 여유 따위는 없었다. 급작스레 달겨들어 제 기체 한가운데를 찌르려하는 팔을 방패로 막은 다음 서둘러 몸을 빼 빔 샤벨을 휘둘렀다. 기량이 많이 회복됐다고는 하나 아직 강화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몸조차 완벽하지 않을 샤아가 제 공격을 완벽히 틀어막기란 흡사 별 따기와도 같았다. 윽!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비틀대는 샤아한테서 눈을 떼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샤아나 네오지온이 다녀간 듯 다 부서져 폐허가 된 보급기지가 보여 옳다구나 쾌재를 불렀다. 육탄전을 하기에는 저기만한 곳이 없군, 자리를 옮겨야겠는데. 제가 먼저 자리를 뜰 경우 때는 지금이다 얼른 퇴각 명령을 내릴 네오지온 상층부 인간들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므로 슬슬 유인하기밖에는 방도가 없었다. 아무로, 아무로 레이! 아아, 아...! 머리가 아픈지 고통스레 외치는 그 모습이 괴로워 기다려, 기다려 샤아. 도와줄게, 도와줄게... 몇 번이고 되뇌었다. 이대로 있다간 저까지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수차례 합을 겨룬 끝에야 겨우 목적지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지금이지, 재빨리 무기를 휘둘러 샤아가 탄 기체 팔을 잘라내자 아...! 탄식 같은 비명이 올랐다. 자, 샤아. 얼른 내려, 얼른 내려. 내가 쫓아갈 테니까, 이번에도 쫓아가줄 테니까 제발 내려. 너한테 지금 방법은 육탄전뿐이 없잖아, 안 그래?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지금...! 관료놈들 너희는 뭘 할 수 있고! 그 간절한 바람이 통했는지 벌컥 열린 콕핏 안에서 노멀 수츠 차림으로 뛰어내려 폐허 속으로 숨어들어 가는 샤아를 다급히 쫓았다. 어쩜 우주를 떠도는 라라아 슨이 도와준 지도 몰랐다, 그녀 역시 샤아 아즈나블이 자신을 잊도록 두고 볼 사람이 아니었다. 라라아, 부디 나를 도와줘...! 그 선연한 이름을 소리내기는 새삼 오랜만이었다. 2차 네오지온 항쟁이 끝난 후로는 다신 부를 일 없을 줄 알았건만 이렇게 재차 꺼내게 되다니 세상 일 참 모르겠다 생각하며 총을 꺼냈다. 구세기가 지나 우주세기가 되었다지만 육탄전 방면은 그렇게 발전하지 않은지라 아직도 가장 널리 쓰이는 무기는 총과 단도였다. 인간 몸 구조도 그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니만큼 먹히는 무기가 같은 것도 그닥 놀랄 거리는 아니었다. 조용히 숨을 몰아쉬고는 몸을 숙였다. 브라이트가 신신당부한 얘기가 떠올랐다. 강화인간들은 힘이 세! 샤아도 분명 그렇게 강화됐을 거야, 조심하라고! 육탄전은 최대한 피해! 허나 자신은 결국 호랑이굴을 직접 찾았다. 정말 학습능력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자조하면서도 후회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혹여 어둠 사이서 갈비뼈를 걷어차일까 몸을 굽힌 채 조심조심 주변을 살피다 재빨리 너른 공터 쪽으로 향했다. 이태까지 한 경험들을 반면교사 삼아보자면 좁은 복도보담 차라리 턱 트여 사각이 없는 곳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편이 훨 나았다. 내가 신장과 체중이 딸리니까 말이지, 이제는 힘이나 체력도 밀릴 테고. 약점은 최소한 줄여두는 편이 좋아, 싸울 태세를 갖춘 다음 주변을 둘러보는 시야 가 즈음 무언가 들어와 몸을 낮췄다. 아무로 레이... 아직 산소가 남은 곳이라서인지 헬멧은 벗은 채였다. 순간 숨통이 콱 막혔다.
꼭 크와트로 버지나 같았다.
물결쳐 흐르는 별빛 긴 머리칼과 부드러워 보이는 피부, 갸름한 턱 선이며 유려한 체형까지 그가 아닐 수 없어 저도 모르게 크와트로야? 물어버렸다. 크와트로? 아아, 그런 이름도 있었다는군. 그런데 아무로 레이 네가 그걸 어찌 알지? 내 적이어서? 총을 빼드는 모습을 보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니, 나는... 아니야. 아니야 샤아. 아무것도. 찰나 샤아가 이상한 낯을 했다. 곧 평소 그 무심한 표정을 덧씌우긴 했으나 잠깐 보인 감정은 분명 의아함이었다. 아무로 레이, 너는 이상하다. 너에게서는 어떤 악의도 살의도 느껴지지 않아. 왜인가? 나는 널 정말 죽이고 싶은데. 내가 위협이 되지 않아서인가? 겉잡지 못할 웃음이 터져 하하, 하하하! 위협이 안 된다고? 헬멧을 벗어던졌다. 깡,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너만한 위협이 내 인생에 또 어디 있는데.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인가? 샤아, 저도 모르게 이를 으득 갈고는 한 발짝 내딛자 다가오지 마, 총을 가슴께 부근까지 들어올렸다. 다가오지 마, 지금 너... 기분 나빠. 그 말투만은 예전과 똑같아 너도 너긴 하구나, 총을 마주 댔다. 기분 나빠, 꺼지지 못해 아무로 레이?! 상대가 총을 발포하기 무섭게 얼른 몸을 숙여 들어가 허리를 잡고는 거의 패대기치듯 누르자 의외로 쉽게 넘어갔다. 어라, 버티는 힘도 셀 줄 알았는데... 전력을 쏟았음을 감안해도 너무 쉽게 넘어간 듯해 너, 허리힘 약해? 물으니 힘이 셀 이유는 뭐 있지? 파일럿은 MS만 잘 다뤄도 된다, 인상을 찌푸렸다. 아, 그럼 힘은 강화시키지 않았나. 그럼 얘기가 훨씬 쉬워진다, 아마 네오지온 상층부 인사들은 이런 돌발 사태까지는 감안하지 않은 모양이라 마릇한 손목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샤아, 말을 이으려는데 입가 양쪽으로 동그랗게 난 생채기가 보였다. 어째 심상치 않다 싶어 이거 웬 상처야? 누가 때렸어? 물은 순간 너랑은 섹스 안 한다, 아무로 레이. 괜한 수작 걸지 마, 분 섞인 경고가 올랐다. 머릿속이 삐이, 울렸다.
섹스?
그래, 섹스. 너랑은 안 해. 너는 내가 없애야할 내 적이고... 연기처럼 뿌옇게 머리를 채우는 소리 속에서도 그 파르란 눈만큼은 선연히 보였다. 미간 사이 비스듬히 세워 난 흉터와 보기 좋을 만큼만 높은 콧날, 살짝 흐트러져 이마를 가린 별빛 머리카락마저도 예전 그대로건만 하는 말만이 달라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는... 기분이 나빠. 그래서 아무로 레이 너랑은 섹스하지 않을 거다. 마침내 속이 폭발했다. 너 지금 뭐라 그랬어? 나랑은 섹스하지 않는다고? 그럼 다른 사람들과는 한다는 얘기인가? 주눅 들었는지 주춤 물러선 멱살을 잡아당겨 대답해, 내가 물었어! 소리를 높이니 마스터와는 하지! 당연한 거 아닌가? 짜증 섞인 답이 돌았다. 내가 그럼 누구랑 섹스 할 것 같아? 더 볼 것은 없었다. 뺨을 퍽, 소리 나게 후려쳐 방어태세를 해제시키고 노멀수츠 목깃을 뜯어낼 듯 잡은 손목을 더듬더듬 감싼 샤아가 잠, 잠깐만. 아무로 레이, 잠깐만!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서는 못한다! 네가 이렇게 나를 원하는 줄은 몰랐군, 하지만 여기서는 못해. 노멀수츠를 벗을 수도 없고 산소도 희박하다. 여기서 하는 건 자살 시도나 마찬가지야. 동반자살이라도 원하나? 나는 싫은데 어쩌지? 그렇게 원할 경우 한 번 쯤은 해줄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아나? 아, 그것보다 좀 내려가 주지 않겠나? 아무로 레이. 구역질나거든, 짜증나고. 네가 날 그렇게 쳐다볼 때마다 머리가 아프다. 두통이 나서 못 견디겠어, 아주 진절머리 나는 감각이다. 내려가는 대신 방금 전 친 부분을 한 번 더 주먹 쥐어 내리쳤다. 아, 좀! 적당히 하지 그러나! 왜 이리 나에게 집착하지?! 무릎을 올려 명치 부근을 거의 찍듯이 쳐 밀어내고는 겨우 호흡을 가다듬는 모습을 보다 푸,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집착이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열다섯 처음 만난 시절부터 제 별이자 인생의 유일한 색이었던 샤아를 지금껏 계속 쫓아온 이유는 한낱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집착이라기에는 너무도 애틋하고 절절했다, 인간 본질과 가까운 느낌이라 해도 좋았다. 때때로 사람들은 아무로더러 너무 냉정하다, 기계만 보다 미친 것 같다, 어릴 적 부모님을 잃어서 그런지 지나치게 공감을 못한다는 빈정거림 섞인 조언을 줬는데 대체로 동의하기 힘들었다. 물론 그 중에는 새겨 들어야할 만한 얘기들도 있기는 했다. 사람과 대화할 적에는 집중을 해야 한다거나 식사 자리에까지 기계를 가져와서는 안 된다는 충고들 정도는 받아들일 만했다. 허나 인간으로서 응당 가져야할 감정이 전혀 없다는 만큼은 인정하기 싫었다. 그래서도 안됐다. 설령 그 화살이 단 한 사람한테만 집중돼있다 해도 어쨌든 있기는 있는 셈인지라 그런 소문을 들을 때면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헛소리야, 냉정히 잘랐었다.
그런데 어째서 너는 나를 잊었지?
어째서 나를 잊었지?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너는 어째서 나를 잊었는가, 감히. 나는 이렇게나 너를 생생히 기억하는데, 아직도 너를 쫓는데, 어째서 너는, 나를 잊고, 그렇게. 총은 필요도 없었다. 8년쯤 전 어느 날 브라이트에게서 더블제타 건담을 몰았다는 파일럿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쥬도 아시타랬지, 뛰어난 뉴타입 능력을 지녀 그 하만 칸을 단지 프레셔로만 압박했댔다. 그녀도 뛰어난 뉴타입이었으니만큼 곧 회복하기는 했으나 한동안은 컨디션 조절조차 잘 못했다 했다. 연방 고위놈들은 그런 데만 집중을 하니까 뉴타입들을 병기로밖에는 써먹지 못하는 거지... 어찌 봐서는 불쌍하기도 해. 불쌍함과 타당함은 전혀 다른 문제지만 말이야, 그리 말하며 브라이트가 어찌나 씁쓸하게 웃었는지 아무로는 아마 폭사할 때에도 저 어조만큼은 잊지 못하리라고 내심 생각했었다.
어쩜 연방은 현실적인 선택을 한 게 아닐까.
평화로 침묵을 이룩하기에는 인류가 너무 멀리 와버렸다, 새하얗게 질려 바들바들 떨다 결국 무릎을 꿇어버린 샤아를 응시하다 힘들어? 천천히 마주 앉은 순간 우욱, 구역질이 터졌다. 저리 가, 저리 가라 아무로 레이...! 계속 속만 게워내는 그 등을 끌어당겨 나랑 같이 가자, 조용히 말했다. 이러나저러나 넌 아플 거야, 비인도적인 대우를 받겠지. 그럴 바에야 지금 나랑 같이 가서 새 삶을 찾아보는 쪽이 훨씬 나아. 나는 적어도 너를 샤아로서 대접해줄 테니까. 너를 샤아 아즈나블 그 자체로 대해줄게. 그러니까 나와 함께 가자, 잘해줄게. 제 프레셔에 겁먹어 속까지 게우는 사람에게 할 만한 제안은 아니었지만 저로서는 최선이었다. 싫어, 싫어. 너와는 같이 안 갈 거다, 절대 같이 안 가...! 어째서 너와 가야, 우욱...! 해...! 채 소화되지 않은 것은 다 게웠는지 이제는 순 샛노란 위액뿐이었다. 목 상하거든, 너무 그러지 마. 어깨를 끌어안아 천천히 일어선 귓가를 싫어, 싫어 넌 내 적이야. 넌 내 적이잖나, 아무로 레이. 널 죽여야 해! 널 죽여야 한다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후볐다. 아무로 레이! 거의 발작하듯 발버둥치기에 밧줄마냥 팔을 둘러막았다. 여기서 나가야 해, 기체까지 거리가 얼마 정도지... 내 헬멧은 샤아에게 줘야겠고, 이 녀석 헬멧을 어디 두고 온 거야? 부서졌나? 바닥을 구르는 헬멧을 주워 몸부림치는 머리통에 꽉 끼우듯 씌운 다음 서둘러 기체 쪽으로 가자 그제야 전투 상황이 보였다. 아비규환이었다, 네오지온 쪽도 이판사판인지 소규모 전쟁이라 불러도 될 만치 판이 커졌다. 쉼 없이 헛구역질하는 샤아를 먼저 태우고는 콕핏 문을 닫고 조종간을 잡았다. 싫다! 날 돌려보내 줘, 아무로 레이! 네 프레셔는 정말 기분 나쁘다...! 우는 소리는 들은 체 만 체하며 브라이트, 아무로 레이다! 샤아 아즈나블을 잡았다, 지금부터는 내가 출격한다! 전선 재정비시켜! 내가 선봉을 맡겠다, 기체 이상 없음! 무전을 날리니 곧바로 알았다! 서둘러 복귀해라, 아무로! 엄중한 답이 떨어졌다. 정신이 반쯤 날아가 눈 깜빡했다간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애가 바로 샤아니만큼 돌아가는 중에도 쭉 지켜봐야한다 생각해 고민 없이 무릎을 내주었다. 두 팔 사이 가둬두면 설사 위험한 행각을 벌인다 해도 금방 막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싫다, 싫어! 아무로 레이, 죽여 버리겠다! 나를 놔줘! 몸을 돌려 목을 조르려 해서 좀 가만히 있어라! 있는 힘껏 박치기를 날렸다. 윽...! 역시 한 번 약해졌다 겨우 회복한 탓인지 이런 공격에도 쉬이 무너졌다. 조금 헐거워진 노멀수츠 목깃 아래로 벌건 잇자국 여러 개가 비쳤다. 간신히 유지하던 평정이 완전히 무너졌다.
누가 감히 내 샤아를 건드렸지?
내 건데, 잃어버렸더라도 곧 내가 찾아갔을 내 건데 감히 어느 누가? 어떤 놈이? 내 샤아를 건드리고도 무사할 줄 알았어? 샤아는 내 거야, 언제나 내 거였어.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어. 그런데 누가 감히? 축 늘어져 힘없이 흔들리는 몸을 바싹 추켜 안고는 조종간을 더 강하게 붙잡았다. 가만 안 둬, 샤아를 이렇게 만든 놈들은 내가 반드시 죽인다. 치열한 공격이 오가는 한복판으로 나가 당장 판넬을 전개하니 아무로 레이? 아무로 레이인가?! 적들은 당황해 허둥지둥한 반면 아군 측에서는 소령님! 아무로 소령님이시다! 각자 맡은 바를 다해라! 환호성과 다음 지시가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허나 아무로는 전혀 고취되지 않았다. 내가 정말로 가만 안 둘 거야, 네오지온 잔당 놈들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처음 전장을 밟은 열다섯 그 어느 날처럼 미친 듯 버튼을 누르고 조종간을 당겨 적들을 날렸다. 아주 약간의 자비조차 베풀어주지 않아 상대로서는 도망간다는 선택지밖에는 선택할 수가 없었다. 아군마저도 텐션을 완전히 따라오지는 못하여 완벽히 보조하기는 포기한 듯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전쟁은 늘 그랬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혼자가 됐다. 지금이라고 다를 것은 없지, 살이 빠졌는지 보기와는 달리 그닥 무겁지 않은 목덜미에 코를 묻어 냄새를 맡았다. 아, 샤아 냄새다. 에우고 시절 몇 번이고 맡은 향이다, 마음 한 켠이 묵직해져 입술을 씹었다.
샤아는 내 건데, 아무한테도 못 주는 내 건데.
목덜미를 완전히 덮은 별빛 머리카락을 한 번 부드럽게 쓸은 손을 옮겨 다시 조종간을 잡았다. 2차 네오지온 항쟁이 끝나고서부터는 전의를 상실한 상대만큼은 그냥 보내주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등까지 보이며 도망가는 적기까지도 정확히 맞춰 폭발시키고서야 무기를 내렸다. 식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별 움직이는 소리도 들릴 마냥 고요해진 주변을 한 번 둘러본 아무로는 다들 수고했어, 고생 많았다. 대규모 작전은 이게 끝일 것 같다, 간단한 인사말만 남기고는 먼저 움직여 함으로 향했다. 아무로 소령님께서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얼빠진 목소리들이 건넨 인사를 들으면서도 그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이따 장비를 벗으면서 아무로 레이 소령이 냉혈한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감상이나 서로들 주고받겠지, 그런 부정적인 감상만이 들어 휴우, 짧게 머리를 털었다. 샤아가 없는 전장은 모든 게 지극히도 순조로울 뿐더러 단조로워 식은땀은커녕 그냥 일반적인 땀조차도 흐르지 않았다.